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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건의 내러티브 리포트] ‘호남선교 1번지’ 나주교회(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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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건 기자 [email protected] 입력 2024.07.15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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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과 부대끼며 천막전도회를 연 유일한 교회
나주문화원 김관영 소장은 “재림교회는 민중과 소통했던 교회”라고 평가했다.

“여기를 보시면요. 저 밑에 나주천을 건너는 다리가 있고요. 그 길이 쭉 이어져 나주교회를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는 나주에서도 중심지였다는 말이죠”


나주문화원 나주학연구소 김관영 소장은 일제강점기 당시 나주의 항공사진을 짚으며 나주교회의 위치상 전도가 잘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소장이 그렇게 분석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민중들과의 소통이었다. 그러고보면 나주교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지역사회와 공동체를 이루고 있던 셈이다.


김 소장의 설명에 따르면 나주의 장로교는 재림교회와 같은 천막전도회를 하지 않았다. 워낙 민심이 험했기 때문이다. 나주는 1896년 11월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 제15차 연례회의에서 광주·전남 선교부 설립지로 선정됐다.


그러나 의료선교사를 포함한 선교팀 구성원들의 안전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지역민들의 반대 등의 이유로 1897년 10월 목포항이 개항되자 선교부를 목포로 이전했다. 그렇다고 나주에서 선교활동을 아예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장에서 전도지를 돌리고 성경책을 파는 등의 활동을 이어갔으나 민중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지는 못했다.


그즈음 민심이 흉흉했던 까닭은 역사적 배경에서 살펴볼 수 있다. 1897년 당시는 한일 병탄이 이뤄지기 전이지만, 일제에 의한 내정간섭이 빈번하던 시기였다. 더욱이 2년 전인 1895년 8월 일제의 압력으로 세워진 김홍집 내각을 통해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단발령이 내려지자 의병이 일어나는 등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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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단발령을 장려하던 나주부 참서관(參書官) 안종수가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나주는 전라남도 도청소재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도지사가 부임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급기야 도청이 지금의 광주광역시로 옮겨졌으니 당시 나주 민중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을 것이다.


김 소장의 설명을 들으니 장로교가 선교부를 목포로 옮겨 간 것도, 천막전도회를 하지 못한 것도 상당부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주에서 천막을 치고 민중과 부대끼며 그들을 먹이고 입혔던 재림교회가 대단한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할 듯했다. 그리고 김 소장이 나주교회를 비롯한 여러 재림교회가 나주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로 민중과의 소통을 꼽은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눈에는 당시 나주교회 성도들이 무모해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1923년 4월 1일자 <동아일보>의 ‘라주의 장날을 리용하야’란 제하의 기사를 보여줬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물산장려운동에 대하야 라주에서도 청년회주체 기타 각단톄 후원으로 음이월이십일 장날을 리용하야 안식교 당로교 남녀학생과 청년회 간부 일동과 회원일동을 합하야 약 사백명의 행렬을 삼대로 난호고 그 압헤는 악대를 세우고 그 뒤 수백명의 학생은 선전가를 놉히부르며 행렬은 점점 성황으로 처음에 시장으로 행진하며 선전서를 배포한 후에 선전의 취지를 간단히 설명한후 다시 시가로 드러가 방방곡곡에 전한 후 오후 네시반에 회관으로 도라와 간단한 강연이 잇슨후에 조선물산장려 만세삼창과 금주 금연 만세 삼창과 라주청년회 만세삼창으로 무사히 헤어젓다더라”


물산장려운동으로 모인 약 400명 중 재림청년과 학생의 수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의 재림교회는 요즘 말로 나주의 ‘인싸 중에 인싸’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어 김 소장은 금명학원 폐교와 관련된 1926년 7월 28일자 <조선일보>의 기사를 보여줬다.


“안식교에서는 안식교예배당을 매도하여 바리고 라주아동을 교양하든 금명학원을 예배당으로 사용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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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비를 감당하지 못해 금명학원을 폐교하고 금명학원 건물을 예배당으로 사용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성도들이 기억하는 구교회의 설립시기와도 대략 맞아떨어지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기사만으로 모든 의문이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기자를 김 소장이 불렀다. “기자님, 방법이 있긴 합니다”


마당에 나온 김 소장은 손가락으로 구교회의 지붕을 가리키며 말했다. “상량문(上樑文)이란 게 있습니다. 새로 짓거나 고친 집의 내력, 공역 일시 등을 적어둔 문서인데, 보통은 대들보에 적어둡니다. 저 지붕을 뜯어서 상량문을 확인하면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옆에서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박석봉 목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상량문에 정확한 날짜만 기록돼 있다면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을 터였다. 구교회의 건축시기에 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선교 110주년을 맞아 구교회를 향토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해서라도 정확한 건축시기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오늘의 논의가 그 첫 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장시간 이야기를 나눠서인지 허기가 느껴졌다. 다 같이 점심을 하려고 했지만 김 소장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 소장을 배웅하고 박 목사와 함께 오붓한 식사를 나누며 오늘의 이야기를 함께 복기했다. 무엇보다 구교회를 나주시 향토문화재로 등록하는 일에 김 소장이 힘을 보태기로 한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부디 나주선교 110주년 기념예배 전까지 가시적 성과가 나오길 기도했다.


박석봉 목사는 “이 지역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병원을 하신 분이 계신데, 한 번 만나보면 어떻겠냐”라고 기자에게 제안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분께 진료 받은 적도 있으니 찾아가면 반갑게 맞아주실 것이라며 앞장서는 박 목사의 걸음이 경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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