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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퇴직금으로 고향에 교회건축 부지 헌납한 홍계선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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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 김범태 기자 [email protected] 입력 2019.04.12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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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신앙적 배경도 없던 내가 한국삼육고에 진학한 섭리는...
홍계선 장로는 자신의 35년 공직생활을 마무리하며 받은 퇴직금을 털어 고향에 교회건축을 위한 부지를 헌납했다.
본인은 일제강점기 말엽인 1944년 3월 5일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에서 9남매 중 8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아버지가 어선을 구입해 사업을 하시다 실패하는 바람에 생활고로 더 이상 중학교에 진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동안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 이를 그만두고, 얼마간의 준비 끝에 중학교 3학년 편입시험에 응시해 합격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대부분의 가정이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던 가난한 시절인지라 학급 50명 중 고등학교 진학희망자가 5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학기 말 어느 날, 당시 경기도 모범학교로 지정된 한국삼육고등학교로 회의를 다녀오신 교장선생님께서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에 못가는 학생은 이 학교에 가면 본인이 원하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조달할 수 있으니 지원해 보라”는 말씀에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학교에 대한 아무런 정보나 신앙적 배경도 없이 그저 일을 하면서 공부할 수 있다는 말에 친구 3명과 함께 한국삼육고에 지원했습니다. 면접관이었던 권혁종 선생님께서 지원 동기를 물으셨던 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면접에서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는데도 친구들 중 유일하게 저만 합격하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이를 추후 고향인 이곳에 교회를 지어 세 천사의 기별을 전파하라는 하나님의 오랜 계획과 섭리로 여기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생활은 공부도 공부지만, 학비를 스스로 벌어야 했기에 무척 고달프고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야경을 하는 게 제일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하여 당장 일을 시작했습니다. 마땅히 공부할 장소도, 시간도 없어 공중화장실 외등 밑에 책을 들고 가 새벽 1시까지 씨름을 했고, 기숙사 이불장에서 몰래 촛불을 켜놓고 공부하다 사감선생님께 들켜 꾸중을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 당시 저는 오직 열심히 일하고 공부해 출세하여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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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뭔지, 믿음이 뭔지도 모른 채 무턱대고 삼육학교에 입학한 저는 그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모태신자도 아니었고, 침례도 받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배웠습니다. 찬양대에 들어가 찬송을 불렀습니다. 학급 담임목사로 활동하기도 했고, MV정상회 등 종교행사에 참여하며 겨자씨만한 믿음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신학생들과 함께 기숙사생활을 할 때라 저는 선배들의 권유로 신학교 진학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교단에 소위 ‘빽’이 없으면 목회에 지원을 해도 좋은 곳으로 발령받을 수 없다는 한 선배의 철없는 이야기에 실망해 일반 대학 행정학과로 진학했습니다. 그것이 제 인생의 진로를 완전히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목회자가 말씀을 전하는데 좋은 곳은 어디며, 안 좋은 곳은 어딜까. 그저 하나님 ‘빽’ 믿고 사명으로 전진하는 것인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연약했던 제 믿음은 선배의 말 한 마디에 삶의 궤도를 틀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목회자의 은사보다는 다른 일을 하라고 인도하신 듯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경기도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고향인 지금의 화성시 남양면 면사무소 직원으로 공직의 첫 발을 디뎠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때부터 신앙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다시 세상 사람이 되어 민원인들과 술을 마시기도 하며 살았습니다.

1971년에는 경기도청에서 직속기관인 성남출장소로 갈 사람을 선발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해 합격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서울 청계천에서 쫓겨난 철거민들이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불만으로 연일 시위를 했고, 관공서에 불을 지르는 일도 빈번해 전국에서 처음으로 불에 타지 않는 철재 책상을 공급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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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을 나가 동향을 살피던 어느 날, 골목길의 자그마한 가게에 한참 공부해야 할 중학생쯤으로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눈썹이나 반지를 만들며 일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부모를 대신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내 공업센터에서 돈을 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철거민들의 삶은 핍절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거의 대부분 사업에 실패하거나 병들거나 어떠한 사정으로 더 이상 서울에 살 수 없어 피신해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학교를 중퇴하고 노동을 해야 하는 현실이었습니다. 곧 해당 동사무소 복지담당자에게 통보해 이런 가정들에 양곡과 밀가루를 공급할 수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또 어린 학생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관계 법령을 찾아봤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도 국가에서 혜택을 줄 수 있는 근거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어느 독지가가 야간에는 50평쯤 되는 사무실을 무료로 빌려줄 수 있다고 하여 이때부터 불우청소년을 위한 야간학교를 운영했습니다. 중등과정을 모집했는데, 금세 80여명의 아이들로 교실이 꽉 들어찼습니다.

공부에 한이 맺힌다는 게 어떤 건지 아는 저는 박봉을 쪼개 책상을 사고, 교과서를 준비했습니다. 하루 종일 공무에 시달리다 퇴근 후 4시간씩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무척 보람 찬 일이었습니다. 입소문이 나면서 경찰, 초등학교 교사 등 뜻을 같이하는 지인들이 합류해 한 과목씩 맡아 시름을 덜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공부한 학생 300여명이 중등과정을 마치고,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마냥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당시 성남시 부시장은 업무도 바쁜데, 야간학교는 그만 두는 게 좋지 않겠느냐며 직접 현장에 찾아와 따가운 눈총을 주기도 했고, 3년 동안 2번이나 과로로 교탁에서 졸도하는 일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공부에 목 말라하는 아이들을 떠올리면 뜻을 굽힐 수는 없었습니다.  

News_9158_file4_v.png그때는 관공서에 전산화가 되어있지 않아 주민등록등본 하나를 발급받으려 해도 보통 일주일 정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루벌이 어려운 형편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이 민원서 하나 때문에 며칠씩 발품을 팔아가며 관공서에 와 비용과 시간을 낭비하는 모습을 보고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부터 집 대문에 <민원상담의 집>이란 간판을 붙여놓고 짬이 나는 대로 민원상담을 해 주었습니다. 늦은 밤이고, 새벽이고 시도 때도 없이 대문을 두드리는 민원인들로 온 가족이 고생해야 했지만, 공직자로서 이 또한 매우 뿌듯한 일이었습니다.  

소식이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자 내무부장관 지시로 전국 시, 군, 읍, 면, 동에 근무하는 7급 공무원 이상은 각자의 집 대문에 <민원상담> 간판을 달고, 퇴근 후에도 주민들의 민원을 처리하도록 하는 조치가 내려졌습니다.

이러한 업무실적을 바탕으로 공무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 가운데 하나인 ‘청백리상’을 경기도 공무원 중에서는 최초로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신앙과는 멀리 떨어진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문서전도인으로 활동하던 엄길수 목사(현 시조사 사장)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시조>를 비롯한 각종 인쇄물을 계속 공급하며 다시 교회에 나올 것을 권유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주5일 근무제가 도입되기 전이었고, 저 역시 말단 공무원이어서 토요일에 교회에 나간다는 건 언감생심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엄길수 목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책을 내밀었습니다. 1988년에는 경기도청에서 부천시 민방위과장으로 발령받아 자리를 옮겼는데도, 부천까지 쫓아와서 끈질기게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다른 직원들의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쏟아지는 업무에 치여 여간 바쁜 게 아닌데도 계속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수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제 마음도 차츰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끔씩 책꽂이에 꽂아둔 <초기문집> <정로의 계단>을 꺼내 읽고, 조금씩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간혹 문서전도인이 방문하면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함께 나누면서 닫혔던 마음의 문을 서서히 열었습니다. 어느 날부턴가는 늘 방문하던 문서전도인이 오지 않으면 소식이 궁금해지고 했습니다. 그들은 탕자처럼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있던 저에게 지치지 않는 열정과 사랑으로 몇 년 동안 공을 들였고, 잃었던 신앙을 회복하도록 선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처럼 10여년을 완강하게 버티던 저는 결국 엄길수 목사를 비롯한 문서전도인들의 강권과 기도로 1997년부터 수원중앙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경우를 통해 문서전도인의 사명은 비단 서적을 판매하며 새 신자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뿐 아니라, 잃은 양들을 다시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엄중한 사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문서전도인이 뿌린 씨앗이 돌밭 같던 제 마음을 녹이고, 생명의 말씀을 공급받아 메말라 죽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저는 교단에 봉사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하여 틈틈이 <교회지남>에 행정과 관련한 각종 법령 및 지침을 소개하는 연재를 하거나 한국연합회 대외사업부 대민업무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지역교회와 성도들의 각종 민원사항을 해소하는 일에 도움을 드리고 있습니다. 행정기관의 불합리하고 억울한 처분을 해결한 게 지금까지 1800여건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2002년 경기도청에서 35년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했습니다.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국장급인 3급 부이사관으로 명예롭게 퇴직하는 축복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에 교회를 건축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퇴직금을 모두 털어 남양면에 부지를 구입하고 한국연합회 유지재단에 기증했습니다.

News_9158_file5_v.png신앙을 다시 회복하면서 나를 잊지 않고 불러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재림교회의 불모지인 남양면에 복음의 등대를 세우겠다는 꿈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자녀들의 학업이나 결혼 등 당장 목돈이 들어갈 일이 많아 고민도 됐지만, 가족들의 믿음과 지지로 큰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교회건축 역시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1999년 수원중앙교회의 분교로 시작한 남양예배소는 출석교인이 10명 남짓한 연약한 집회소입니다. 성전건축을 결의한 지난해 5월 기준 모아 놓은 자금이 5000만 원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열심히 기도를 하면서도 ‘과연 교회를 지을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건축비가 정 부족하면 우리 가정이 부담하자는 심정으로 일단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살아계셔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풀지 못할 것 같은 문제를 시시때때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때,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이 흔쾌히 도움을 주었습니다.

자신의 가정생활도 빠듯하고 어려운데, 기꺼이 호주머니를 털어 건축헌금을 보내주신 성도들이 여럿이었습니다. 이웃 교회들이 십시일반 자금을 보태주었습니다. 수원중앙교회는 2차에 걸친 건축헌금 약정으로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건축을 맡은 정은석 집사님은 자신의 집을 짓듯, 정성을 다해 시공했습니다. 헌신한 교회와 성도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협력해 주신 교회와 성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주를 통찰하시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각처에 흩어져 있는 믿음의 백성들을 통해 남양교회는 재정적 어려움 없이 성전을 건축할 수 있었습니다. 야훼의 하나님과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과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돌리며, 이 성전을 주께 바칩니다.

남양교회 건축위원장 홍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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